대학 축제가 있던 어느날 큰 행사 두개가 같은 날에 잡혔던 적이 있었다. 나는 두 곳 모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한곳을 선택해야했기 때문에 난감했었다. 그래서 이쪽 모임에 가서는 저쪽 모임에서 큰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참석하기 어렵다는 변명을 늘어놓고, 저쪽 모임에 가서는 이쪽 모임에 큰 행사가 있기 때문에 참석을 못한다고 변명을 늘어 놓았다. 문제는 그렇게 하고나서 어느곳 하나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이야기를 여러번 다른 사람에게 한적이 있었지만, 아무도 나의 행동을 정확하게 해몽해준 사람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의 행동이 그냥 어리석었다고 결론 내릴 뿐이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큰 책임이 따르는 결정을 해야할 순간에 결정을 회피하고 남의 탓을 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가 문제였다. "이쪽 행사에서 오라고 해요"라는 변명으로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고나면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회사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프로젝트가 하나 끝나고, 최신 엔진을 구매해서 업그레이드를 할것인가 아니면 기존의 엔진을 개선시켜나갈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4개월째 "고민"만 하고 있다. 아무도 선뜻 나서서 이렇게 해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없고, 소문이 퍼지듯이 혹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씩 던지는 형태로 의견을 주고 받는다.
또 한가지 같은 패턴의 문제를 발견하게 되는 곳은 회사에서 저녁 식사를 주문할때이다. 회사가 한창 바쁠때에는 사람들이 늦게까지 남아서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날은 항상 회사에서 단체로 저녁 식사를 주문해준다. 어느 음식점에서 음식을 주문할거라는 공지가 나면, 그 음식점 메뉴를 보고 각자가 원하는 것을 주문하면 되는 식이었다.
그런데 나의 기억으로는 하루도 빼 놓지 않고 거의 항상 음식에 대한 불평이 있었다. 사람들이 평소에 흔히 가는 음식점에서 주문을 해도 불평은 마찬가지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이 사람들이 자기 차 몰고 나가서 직접 그 음식점에서 그 음식을 시켰다면 이렇게 불평을 하지는 않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결정"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회사를 비난하면서 음식에 대한 불평을 할수 있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므로 불평을 하지 못할것이다.
또 한가지 개인적으로 흥미롭다고 생각되는 경험을 하고 있는데 공유해보면 이렇다.
어느 일요일 점심 시간에 차를 타고 나가서 점심을 먹으려고 차를 탔는데, 거기에 앉아서 한시간동안 무슨 음식을 먹을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던일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간신히 결정을 내려 점심을 먹고 난뒤에도 무엇을 해야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결정하지 못해서 한시간동안 혼자 짜증만 내고 있다가 차안에서 반시간 정도 자다가 집에 돌아온적이 있었다.
왜 이런일이 있었는지 이해하는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지난 일년동안 점심을 직장동료들이랑 같이 먹으러 나가는데, 나는 항상 "뭘 먹어도 좋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음식 선택에 대한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었던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할 순간에는 수 많은 고려사항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매우면서 장단점을 계산하느라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신기하다고 생각되었던점 하나는, 실존주의 문학작품들에 "어디로 가야할지 정할수 없었다"라는 내용이 매우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대표적인 실존주의 문학작품인 "오발탄"의 끝에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
"그래 난 네 말대로 아마도 조물주의 오발탄인지도 모른다. 정말 갈 곳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에반겔리온의 주인공도 항상 자기 스스로 결정해서 하는일이 없고 항상 아버지가 시켜서 하고 있을뿐이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런데 이런 "결정"과 "책임"의 문제가 어떻게 "실존주의"와 연관이 되는 것일까?
실존주의는 삶을 대하는 태도들중의 하나이다. 예를 들어,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항상 "모든것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돌아간다"고 믿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성이나 과학의 힘을 믿는 사람들은 "모든 것은 논리와 이성으로 설명될수 있다."고 믿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실존주의는 삶의 목적성이나 방향성 자체를 부정한다. 신의 위대한 계획을 부정하는 것과 동시에 이성으로 모든것을 설명할수 있다는 믿음도 부정한다. 모든 것은 "우연히" 던저져 있을 뿐이다.
따라서 나의 삶을 어떤식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결정"이라는 태도이다. 신이 정해주는 것도 아니고, 발달된 문명이 정해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떤식으로 살아갈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남들 다 살아가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택한다. 이런 태도는 설혹 그 선택의 결과가 불행으로 이어진다하더라도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회가 잘못되어서"라는 변명을 할수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학가기 싫지만 어쩔수 없이 간다"라든가 "결혼하기 싫지만 시기를 놓치면 안된다더라"라든가 "일하는게 보람이 전혀 없지만 어딜가나 마찬가지다"라는 식으로 스스로의 의지나 결정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책임을 떠 넘기는 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삶에 대한 방향을 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고 해서 책임이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남에게 그 책임을 넘기려해도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가 지는 것이다. 부모님께서 "이런 사람이랑은 결혼하면 안된다" 하고 반대하신다고 하더라도 결국 결혼해서 같이 사는 것은 자기 자신인것 처럼,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은 결국 나에게로 돌아온다.
여기에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는데
실존주의 문학은 항상 극한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극빈곤이나 전쟁의 상황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실존주의는 항상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사상인가?
나의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극한의 상황을 통해 문제를 더 극명하게 보여줄수 있는것 뿐이지, 물질적인 삶의 수준이 높아졌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며 사는것은 아니다. 오히려 물질적인 조건이 좋아지면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가 쉬워진다.
예를 들어, 가정 형편상 대학에 갈수가 없는 집의 아이에게는 대학을 가는 것에 대한 의미를 찾아야할 숙제가 주어진다. 스스로 고민해보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면 과감히 버릴수 있는 선택의 여지도 주어진다. 하지만 가정 형편이 풍요로운 아이에게는 오히려 자신의 삶을 고민하고 결정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남들 다 하는데로 묻어가면 그만이다. 그래서 마치 아무런 문제도 없는 인생을 사는 것 처럼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