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아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 우리 나라 속담이 있습니다.
기쁨은 나누면 두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
아래 내용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중간 중간 제가 임의로 해석체 문장을 수정하거나 생략 했습니다.
주는 것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이 문제는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매우 애매하고 복잡한 것이다.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잘못된 생각은, 주는 것이란 뭔가를 포기하는 것과 빼앗기는 것, 희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성격이 받아들이는 (착취하고 저장하는 것등) 것을 지향하는 단계를 넘어설 만큼 발달하지 못한 사람은 준다는 행위를 이런식으로 경험한다.
(give and take에 익숙한) 시장형 성격은 오직 받는 것에 대한 교환으로서만 주려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받지 않고 주는 것은 사기당하는 것이다.
성격이
비생산적인 사람은 준다는 것을 가난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 대부분은 주기를 거부한다.
어떤 사람들은 희생이라는 의미에서 주는 것을 덕으로 삼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덕은 희생을 감수함으로써 얻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낫다는 규범은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보다 박탈당하는 것을 참아내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생산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들에게 있어서 준다는 행위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는다.
준다는 것은 잠재력의 최고의 표현이다.
준다는 행위 그 차체를 통해서 나의 힘과 부와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는 것은 나를 환희로 가득 채워준다.
나는 자신을 충만되어 있고 소비하고 살아있는, 따라서 즐거워하는 자로 경험한다.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왜냐하면 (주는 것은 박탈이 아니라) 주는 행위를 통해서 나의 생동감을 발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 영역에서 주는 것은 곧 가난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 볼 때, 어떤 것을 잃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사람은 그가 얼마나 많이 가졌든 간에 가난한 사람이며, 가난해진 사람이다.
그는 타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인간으로써 자신을 인식한다.
반대로 자기 자신을 남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은 부유하다.
그는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경험한다.
오직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필수품마저도 상실한 사람만이 물질적인 것을 주는 행위를 즐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는 것의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인 면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에 있다.
그는 받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니다. 준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기쁨이다.
하지만 주는 것을 통해서 그는 필연적으로 타인의 삶에 뭔가를 가져 오게 된다.
또한 이렇게 가져온 것은 그에게 되돌아온다.
진실로 주게 될 때 그는 그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주는 것은 타인을 역시 주는 사람으로 만들며, 그들은 서로의 삶에 가져온 것을 함께 즐기게 된다.
주는 행위 속에서 뭔가 탄생하며 관계된 두 사람은 새로 태어난 생명력에 감사하게 된다.
특히 이를
사랑과 관련지어 보면 사랑은 사랑을 낳는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무능력은 사랑을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사랑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즉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삶의 표현'을 통해 자신을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능력이요 불행을 의미한다.
주는 것은 사랑과만 연관되어있는 것이 아니다.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배울 수 있고, 배우는 관객에 의해 자극 받으며, 정신 분석가는 그의 환자에 의해 치료받을 수도 있다.
이것은 그들이 서로를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고, 서로가 진실하고 생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