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철도 999 라는 일본 만화영화(?)는 한국 사람들에게도 일본사람들에게도 매우 유명합니다. 하지만 은하철도 999의 끝이 어떻게 종결되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것 같습니다.
주인공인 "철이"는 TV방영분 총 113편의 여정의 마지막 도착점으로 "프로메슘"이라는 행성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 행성에 살고 있는 시민들은 "기계인간"들인데, 몸이 기계로 교체되었기 때문에 영원히 살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기계의 몸을 얻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기 때문에 서둘러 무언가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살아 있어도 삶에 대한 의욕이 없는 영원한 삶.
이것은 오히려 죽음에 더 가까운 삶이었던 것입니다.
철이도 기계인간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이 행성에 오게된것이지만, 결국 기계인간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육신을 가진 보통 인간으로 살아가겠다고 결정하게 됩니다.
요즘 이 스토리가 계속 제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는 것은 "Sartre"의 "구토(Nausea)"라는 소설 때문입니다. Sartre가 느낀 "자유"는 모든 사회적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 사람들의 관계로 부터 벗어난 완전한 "자유"였습니다. 그런데 Sartre는 그 자유 속에서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 자유는 죽음과도 닮은 자유라고 묘사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세 이전의 시대에 인간은 자연에대한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했습니다. 굶주림과 질병의 공포가 있었고,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라도 올려야 했을 만큼 무기력했습니다.
중세 시대를 거치면서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러한 "자연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수 있었고, 다수의 사람들은 "사회 신분 계급"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했습니다.
중세 시대 이후, 인간은 신분 계급 제도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자본주의의 힘으로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워졌습니다. 다시 말해 자연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누리는 자유는 생명력 넘치는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죽음에 가까운 외로움인것 같습니다.
Erich Fromm 은 독일의 파시즘(Facism)을 보면서, 고립과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했던 사람들이 파시즘으로 퇴보하였다고 설명합니다. 스스로의 자유를 포기하고 권위자에게 의탁하는 노예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20세기의 마지막 지성인이라고 불리는 Sartre 는,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고 말합니다.
중세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약 500년에 걸친 인간의 자유에 대한 열망은 결국 외로움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한걸까요? 은하철도 999의 철이가 찾던 영원한 생명은 결국 죽음에 가까운 생명이었던것 처럼요. 자연으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하면 2000년이 넘는 여정이었다고도 할수 있겠습니다.